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56) 파주행복장터 밴드지기 최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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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굉장히 부지런하다. 이 곳 저 곳을 다니고, 이 것 저 것을 두려움없이 해낸다. 파주토박이, 법원리 천석꾼 둘째딸, 금촌 닭갈비집 주인장, 파주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 파주녹색당원. 지금은 파주행복장터 밴드지기가 되어 파주를 해집고 다닌다.
장단콩 두부로 시작한 파주행복장터
파주행복장터는 ‘장단콩 장담그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13년, 최정분씨는 장단콩으로 장담그기를 하자고 지인들을 모았다. 각자 자기 항아리를 사서, 민통선 안 배밭에 공동 장독대를 만들었다. 장만들기 2년차인 2015년에 파평면에 마을사업으로 만든 ‘장단콩두부사업장’에서 두부를 만들어주었다. 그 두부맛을 보더니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우리도 이 두부를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두부사업장은 장단콩 축제와, 콩 1말 이상 주문이 들어와야 두부를 만드는 마을기업이었다.
두부를 먹고 싶은 마음에 그 해 추석 무렵에 전화를 돌려서 두부 주문을 받았다. 80모 두부를 주문하고 집집마다 배달해주었다. 그날 밤 12시에 일이 끝났다.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끝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두부를 먹어본 사람들이 자신이 포스트가 되어 사람들을 모으겠다며 두부를 계속 만들어 먹자고 했다. 그 때 모인 가구가 14가구. 그래서 밴드를 만들었다. 주문할 사람은 밴드에 주문하도록 하자. 그래서 2015년 12월, 파주행복장터가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파주행복장터는 매주 두부를 주문하고, 파평면 ‘장단콩두부사업장’은 매주 두부를 만들게 되었다.
통일대교에서 만나는 달걀과 사과와 쌀
이렇게 매주 두부를 만들고 배달하다보니, 여러 농부들의 생산물도 같이 나누게 되었다.
배달하는 날(지금은 금요일인데, 앞으로 수요일로 바뀐다함) 아침 8시에 민통선앞 통일대교에서 남남북녀 만나듯이, 사람과 농산물이 만난다. 민통선안 방사 유정란, 통일을 염원하는 6.15사과, 배농사도 잘 짓는 전재규 할아버지의 쌀을 받아 차에 싣는다. 그리고 파평 ‘장단콩두부사업장’으로 간다. 그곳에 가면 그날 아침 출발한 어유지리의 고구려목장 더지스 우유와 요쿠르트를 만난다. 현미누룽지, 엄나무된장, 보리고추장, 식현리 수제쨈, 천연발효 유기농 서야곱 핸드메이트빵, 장단콩초콜렛 등등을 가구별로 정리하고, 배달을 시작한다. 맨처음 가는 곳이 파평면 ‘평화를 품은집’과 ‘밤곶이놀자숲놀이터’이다. 이렇게 매주 50여가구를 먹거리를 배달한다.
“나는 ‘농업인·소상공인 홍보대사’예요”
이 파주행복장터의 밴드 회원은 현재 854명이나 된다. 회원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그것은 밴드지기 최정분씨가 ‘농업인 소상공인 홍보대사’를 자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먹거리, 정성담은 물품, 좋은 생각을 나누는 장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주고 있다. 소비자는 소비자대로 좋은 먹거리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생산자는 유통 걱정 없이 정성을 다해 생산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 곳. 이 파주행복장터가 바로 그런 곳이다. 지금은 지역 생산자가 16명, 다른 지역생산자가 10명이 있다고 한다.
회원 누구나 다른 사람을 초대할 수 있지만, 생산자는 밴드지기인 최정분씨와 협의해야한다. 생산자의 밴드 가입조건이 특이하다. 밴드에서 자기 생산물을 광고하고, 판매할 수 있는데도 회비없이 단 두 가지 조건만 동의하면 된다고 한다. “첫째, 임진강 생명평화축제때 조직위원이 되어 달라는 거예요. 조직위원은 3만원을 내는 건데, 모두 동참했어요. 둘째는 판매글 외 지역 소식이나 계절사진 등 자신의 이야기를 실어달라는 거예요. 밴드가 재밌어야 하고 정이 넘쳐야 하니까요.”
지금까지 강제탈퇴한 사람이 200명이 넘는다. “밴드는 어린아이 다루듯 정성을 다해야해요. 한밤중에도 밴드를 챙겨서 정리해요. 안그러면 광고가 넘치고, 홍보물이 넘쳐버리죠. 아무리 절박해도 주 2회를 넘기지 않도록 조절하고, 지나치면 삭제해요. 그래야 우리밴드가 재밌고 유익한 곳이 되니까 어쩔 수 없죠.” 회원이 많으니 신경쓸 일이 많다.
올해는 생산자 방문의 날을 만들어, 소비자와 생산자가 만나는 파티를 하려고 한다.
17년 동안 금촌닭갈비집 사장님
그는 1967년 파주 법원리에서 태어났다. 법원초, 법원여중, 의정부여고를 나오고 연암공과대, 방통대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했다. 금성통신(지금의 LG전자)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그 때 여의도 쌍둥이 빌딩에서 같이 근무하던 김문권씨를 만나 29세에 결혼을 했다. 결혼하고도 8개월쯤 더 직장을 다니다가 사직서를 내고, 금촌에 닭갈비집을 차렸다. 30세에 시작한 닭갈비집을 17년 동안 운영하다가 2012년에 조류독감으로 크게 타격을 입고 가게를 정리했다. 지금은 조류독감에 대해 저항력이 생겼지만, 당시에는 닭고기 먹으면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이 컸다. 1명의 손님이 없는 날도 있었다. 매장도 80평으로 컸고, 오랫동안 같이 일한 사람들을 자르지 못해 월급 주다보니 적자가 누적되어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롯데아울렛, 신세계 첼시 들어오면서 지역상권이 무너지는 와중이었다. 이 대형유통업체가 들어오기 전만해도 금촌 가게들은 프리미엄이 6~7,000만원이었고, 그것도 없어서 못들어오는 지경이었다. 옷가게에도 4~5명, 신발가게에도 4~5명의 직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장사가 안되니 직원들을 내보내게 되고, 그러다보니 먹거리 가게를 이용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자연히 닭갈비집을 정리하게 되었다.
‘눈을 맞추는 소비’가 모두 사는 길
“대형유통업체가 들어오면 돈이 파주안에서 안돌게 되요. 피가 안도는 것과 같은 겁니다. 중산층이 무너지듯, 지역상권이 무너지고... 돈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소비행태를 벗어나 ‘눈을 맞추는 소비’가 필요해요. 그게 피를 돌게 하는 길입니다.”
금촌 상권이 죽어가는 것을 직접 체험해서인지,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있었다.
“더지스 우유 사장님은 자기가 만든 우유를 먹는 소비자 이름을 알아요. 얼굴은 몰라도. 자기 우유를 사드시는 분들을 고마워하지요. 6.15사과 사장님도 본인이 밴드를 보면서 직접 체크합니다. 소비자 이름을 알고 고마워하고, 연결해주는 나에게도 고마워합니다.”
그러면서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민통선안 복숭아 농장이 있는데, 이마트 셀러가 와서 8,500원에 납품하라했는데, 거부하고 직거래로 2만원에 팔았다. 이 농장주인은 연구를 많이 하면서 정성껏 농사짓기에 맛이 뛰어났다. 직거래로 2만원에 팔아도 없어서 못팔지경이었다. 그래서 올해는 복숭아 농사면적을 늘렸다고. “이마트에 8,500원에 내놓는다고 소비자가 싸게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예요. 매장에서는 아마도 18,000원 내외로 팔거예요.”
그는 농부가 안심하고 농사를 더 많이 지을 수 있도록 자신이 농부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되었다며 자랑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배운 ‘콩세알’
최정분씨 할아버지 고향이 장단이었다 한다. 장단에서 법원리로 피난 나왔다가 정착하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는 끝까지 궤짝에서 짐을 안풀었다고 한다. ‘이제 곧 고향가야하는데, 뭐하러 집을 짓냐’며 허물어지는 집에서 그냥 살았고, ‘밭에 나무를 심으면 이사갈 때 뽑아갈 수 없다’며 나무도 심지 않아서 밭이 그리 넓어도 과실수 하나 없었다. 아버지가 다섯 남매를 낳아 집이 좁아져서 어쩔수 없이 방을 넓히려고 하다가 집이 허물어졌다. 그래서 블록집을 크게 지어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천석꾼 부자였는데도 학교에 보내지 않아, 미군 세탁소 일을 하다가, 학교 소사 일을 하셨다.
“저기 사람들이 굶어보지 않아서 모르는데... 저 논바닥이 얼마나 곡식이 많이 났던 댄지 아니? 저기는 어마어마한 곡창지대다. 쌀 떨어지면 꼭대기 20층, 30층에 누가 가서 살겠노?” 운정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논이 없어지는 것을 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할아버지 때문에 서당 말고는 학교에 가보지 못해 술 드시면 한탄을 하시던 아버지도 최정분씨에게는 철학자였다. 닭갈비집 하면서 식당에 필요한 채소를 아버지와 함께 농사지으면서 장사를 했기에 아버지 말씀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콩 세 알 아나? 하나는 날짐승, 하나는 땅짐승, 우리 사람은 콩 하나를 먹는 거다. 하나를 먹으려고 두 개를 나눠준다. 그런데 지금은 콩 세 알을 다 먹으려니 오염되고 병에 걸린는 거다.” 그렇게 아버지는 1,500평 땅을 일구어 다섯 형제를 모두 먹여주었다. 귀하게 자란 것을 먹을 수 있었던 최정분씨는 “혜택을 받은 내가 줘야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농업인 홍보대사로 자임하는가 보다.
환경운동가로, 녹색당원으로 변신
“소소하게 눈을 맞추면서 팔아주던 조그만 동네가 소란스런 동네가 되었다. 첼시가 들어오고, 자유로가 뚫려 고즈넉한 강변 마을이 없어지고, 운정신도시가 들어서면서 논바닥이 콘크리드 바닥이 되고, 동네 물이 더러워지고, 소각장이 생기고....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부터 이런 것들이 불편해지더니, 누군가가 얘기해야하는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파주환경운동연합을 찾아가서 후원을 하다가 운영위원을 하게 되었죠.”
최정분씨는 환경운동가로 변신하게 된 이유는 불편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대가족과 함께 살았고, 오랫동안 가게를 해서인지 사람을 만나는 게 편하고 쉽기에 회원 늘리는 일을 자원했다고 말했다. “목소리가 필요하면 가고, 사람 모으는 일이 필요하다면 그 일을 해요. 환경에 대한 디테일한 지표나 통계 등은 잘 몰라요. 그냥 사람 좋아서 하는 거예요.”
파주환경운동연합 회원 늘리기에 앞장 서온 그가 녹색당원이 되었다. “파주환경을 시민단체만 지키는데 한계가 있다고 느꼈어요. 환경운동으로도 변화가 생기지 않는 이유는 파주 공무원과 파주 토착민 인식이 개선되지 않기 때문이죠. 이 변화를 위해 정치 활동을 시작했어요.”
“통일 마중할 마음의 준비 하고 살자”
소망을 물었더니, 단숨에 ‘통일’이라고 답했다.
“남쪽은 많이 다녀보기도 했지만, 한반도의 가운데에 살면서 왜 맨날 남쪽으로만 가냐고? 이런 생각이 들어 이젠 남쪽으로 여행을 안다니고, 그래서 수평으로만 여행다닙니다.” 통일을 지향하는 어느 중년 아줌마의 이유있는 고집이다. 강화도 교동도. 강원도 화진포, 연천, 철원으로만 다닌다고 한다. 장단이 고향이던 할아버지의 한을 평생 보아왔기에 그런가?
“진짜 갑갑해요. 요새 민통선 다니면서 나라도 길을 닦아놓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그러면 우주의 기운이 열리지 않을까요? ”
다음엔 통일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 시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램을 말했다. 파주가 분단되어 있는 꼴이니, 통일에 가장 앞장서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통일의 중심 가치가 생명과 자연 생태라고 봅니다. 흙이 살아있는 북한의 생태적 가치를 살리는 방향으로 통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통일을 녹색의 가치로 실천하자는 그는 우리 파주시민 모두 ‘통일을 마중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자’고 여러번 강조했다. 그가 만든 파주행복장터도 통일로 가는 녹색기차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임현주 기자
#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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